감이당 / 불교와 과학 S3 /
『한 원자 속의 우주』 / 202503
원자에서 도솔천까지
작은 것을 파고들었더니, 세상이 뒤집혔다. 현미경을 들이댔는데, 망원경으로 우주를 본 것처럼 아득한 질문이 튀어나온다. 이게 현대 물리학의 역설이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입자, 그것도 전자 하나, 광자 하나를 바라보다가 문득 묻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본다고 믿는 이 세계는 과연 실재하는가?
양자역학은 현상 너머의 실체를 탐구하려다 실체 자체를 해체해버린다. 그 어떤 학문보다 작고 미세한 세계를 다루지만, 그 속에는 인간의 인식과 존재, 윤리와 정치까지 뒤흔드는 낯선 진실이 도사리고 있다. 이쯤 되면 물리학이라기보단 우주 드라마다. 연출은 하이젠베르크, 주연은 슈뢰딩거의 고양이, 특별 출연은 당신과 나. 그리고 배경 음악은—아직 관측되지 않은—무한한 가능성의 파동장.
고전 물리학은 질서였다. 무엇이 어디에 있고, 어떻게 움직이는지 정확히 계산할 수 있다는 그 믿음은, 세계를 거대한 시계태엽처럼 여기게 만들었다. 질량이 있고, 속도가 있고, 공간과 시간이 명확히 분리되어 있으며, 물체는 고유한 실체를 가지고 있다고 여겨졌다. 말하자면 이 세계관은, 모든 존재가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거기서 움직이지 않는 고정된 연극 무대 같은 것이었다.
그 안에서 인간은 하나의 독립된 주체였다. 나는 여기에 있고, 너는 저기 있다. 이 사물은 나와는 아무 상관없이 '존재'하고, 나의 개입 없이도 그 본질을 유지한다고 믿었다. 이 얼마나 안정적이고, 동시에 얼마나 단조로운가. 자아는 그 속에서 분명하고 견고한 성이었다. 흔들리지 않고, 무너지지도 않는 튼튼한 콘크리트 구조물 같은 것. 이 견고함이 안도감을 줬지만, 동시에 상호작용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감옥이기도 했다. 나를 둘러싼 세계는 배경이고, 나는 그 위를 걷는 유일한 주인공. 멋있어 보이지만, 외롭고 고립된 드라마다.
양자역학은 이 고전적 성벽을 아주 우아하게 허문다. 무너뜨리는 것도 아니다. 쿵쾅 부수는 게 아니라, 슬그머니 밀고 들어와서는 '그 벽, 진짜 있었어?' 하고 묻는다. 이중슬릿 실험, 말만 들어도 과학계의 뜨거운 연예인처럼 유명하다. 전자는 입자이기도 하고 파동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평일엔 교사지만 주말엔 밴드 보컬인 셈이다. 상태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 이건 "존재한다"는 말 자체를 애매하게 만든다. 측정하기 전에는 그 전자가 어디 있는지, 어떤 상태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측정하는 순간, 마치 "나 여기 있었어!" 하고 갑자기 포즈를 잡는다.
즉, 존재란 관계 속에서만 드러난다. 입자는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보는 행위에 반응하는 무대 위의 배우처럼 존재하는 것이다. '관찰'이라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그 입자는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선언했지만, 양자역학은 말한다. "누군가 나를 본다, 그래서 나는 존재하게 된다." 자아는 생각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관계의 응시 속에서 잠깐 드러나는 그림자다. 우리가 믿고 있던 단단한 자아는 실은 흔들리는 커튼, 바람 따라 펄럭이는 경계선일지도 모른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한 마디로 말해, "둘 다는 안 돼!"를 선언한 셈이다. 위치를 정확히 알고 싶다면, 운동량은 포기하라는 것. 반대로 운동량을 측정하면, 그 입자가 어디에 있는지는 안갯속이다. 이건 기술의 한계가 아니다. 원리 자체가 그렇다. 말하자면, 입자는 숨바꼭질의 달인이다. "네가 나를 보려는 순간, 나는 이미 움직였지롱!" 하는 식이다.
즉, 사물은 두 가지 특성을 동시에 드러내지 않는다. 존재라기보다는 가능성, 그것도 활짝 열린 가능성의 장이다. 여기엔 확정도 없고, 예측도 없다. 세계는 더 이상 톱니바퀴가 맞물린 기계장치가 아니다. 미래는 프로그램된 스크립트가 아니라, 언제든 다른 페이지로 튀어오를 수 있는 드라마다. 결정론은 퇴장했고, 중첩이 무대 중앙에 섰다.
중첩이란 무엇인가. 이 상태이기도 하고, 저 상태이기도 한 것. 아직 결정되지 않은 여러 가능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상태다. 말하자면, 우리의 일상과도 닮아 있다. "오늘 점심 뭐 먹지?"—된장찌개도, 김치볶음밥도, 샐러드도 모두 머릿속에 존재하지만, 막상 식당 문 앞에 서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확정되지 않는다. 모든 선택지는 가능성의 장 안에 있다. 존재가 아니라 관계, 실체가 아니라 움직임. 그것이 이 세계의 새로운 작동 방식이다.
이런 세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물리학자는 수식으로, 시인은 이미지로, 철학자는 개념으로 풀어보려 애쓴다. 하지만 어쩌면 가장 중요한 건, 익숙한 '확정'의 프레임을 내려놓는 일이다. 알아야 할 것은 '답'이 아니라, 그 답이 형성되는 조건과 흐름이다. 불확정성은 모름이 아니라, 열린 앎이다. 삶도 그렇다. 정해진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가능성들 사이를 유영하는 것. 그 긴장과 떨림 속에서 우리는 살아 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실험은 이 점을 아주 기묘하게 보여준다. 고양이는 상자 안에서 살아 있으면서도 죽어 있다. 미스터리 소설도 아니고, 스릴러 영화도 아닌데, 생과 사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설정이라니. 얼핏 보면 허무맹랑한 소리 같지만, 양자역학의 세계에선 이게 '합법적'이다. 존재가 논리적 모순의 정점을 찍는 순간이다. 그런데 이 모순은 논리를 깨뜨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논리의 지평을 확장시킨다. 상반된 상태가 공존하는 현실을, 기존의 이분법적 사고로는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다는 것. 이건 철학에 대한 모욕이 아니라, 철학에 대한 도발이다.
고양이의 생사불명의 상태는 사실 우리의 삶과도 닮아 있다. 이 관계는 무엇인가? 사랑인가 우정인가? 혹은 업무상의 인맥인가?—확정되지 않은 상태로 계속 떠 있는 인간관계처럼 말이다. 말하자면, '감정의 중첩 상태'다. 그러니 이 실험은 실험이라기보다는, 존재론적 알레고리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불교, 특히 대승불교와 자연스럽게 만난다. 존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조건과 관계에 따라 달라지는 것. 고양이도, 인간도, 나도 너도, 그렇게 떠 있다. 살아 있으면서도 죽은 채로, 웃으면서도 울고 있는 채로, 한쪽 문은 닫고 한쪽 창은 열어둔 채로. 이 얼마나 불교적이고, 또 얼마나 현대적인가.
불교의 공(空)은 비움이나 허무가 아니다. 실체가 없다는 선언이며, 동시에 실체 집착에 대한 날카로운 경고다. 세상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관계 속에서만, 그 순간의 맥락 속에서만 드러난다. 그러니 실체를 붙잡으려는 손길은 곧 고통의 시작이다. 연기, 상호의존, 상호작용—이 세 단어는 우주적 사기극을 해명하는 불교의 수사학이다.
고정된 자아는 없다.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와 같다고 믿는 순간, 삶은 반복의 덫에 갇힌다. 단단한 실체도 없다. 사물은 끊임없이 변하며, 조건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출몰한다. 마치 날씨 같기도 하고, 인간관계 같기도 하다. 좋아했다가 밉고, 가깝다가 멀어지고, 다정했다가 낯설어지는—이 모든 변화는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은 양자역학의 세계와 거울처럼 마주 본다. 물질이 입자인 동시에 파동일 수 있다는 사실은, 존재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상황과 관계에 따라 다르게 드러난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한다. 전자가 어디에 있는지, 어떤 상태인지조차 측정 없이는 알 수 없다. 그것은 불확정성이고, 중첩이며, 다층적 관계망이다.
불교는 이러한 존재의 다면성을 천 년도 훨씬 전에 간파했다. 단단함보다 흐름을, 고정보다 관계를 본 것이다. 존재를 해체한다는 것은, 삶을 흐르게 한다는 뜻이다. 고통이란 실체를 믿는 마음에서 비롯되므로, 그 실체를 지워내는 순간, 고통의 뿌리도 함께 사라진다. 공은 해체이자 개방이다. 문을 닫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열어두는 방식이다.
이 해체가 우리의 삶에서 절실한 이유는, 바로 우리가 매일 겪고 있는 고통의 뿌리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단단히 붙잡고 싶어 한다. 사람을 만나면 '저 사람은 이런 사람이야' 하고 낙인을 찍고, 사건을 겪으면 '이건 옳고 저건 그르다'며 딱지를 붙인다. 그렇게 이름을 붙이고 틀을 씌우는 순간, 세계는 선명해지지만 동시에 갑갑해진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감옥이 된다.
그 감옥의 이름은 두려움과 혐오다. 낯선 것을 향한 경계심, 다른 생각을 품은 사람에 대한 분노,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무조건 배제하고 싶은 충동. 이것이 우리 안의 실체 집착이 만들어낸 괴물이다. 그 괴물은 '간첩'이라는 단어로 등장하고, '멸공'이라는 유령으로 떠돌며, 70년대 교과서에서 튀어나온 듯한 말들이 TV 자막처럼 현실을 점령한다. '그는 간첩이다!' '이건 멸공이다!'—이런 외침은 사실 '나는 불안하다'의 다른 표현이다. 낯선 세계를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리는 그 세계를 지워버리고 싶어진다.
하지만 양자역학은 말한다. 실체는 없다, 고정도 없다. '존재한다'는 것은 곧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혐오란 무엇인가? 관계의 불편함을 참지 못하고, 그 복잡함을 단순화하려는 폭력이 아닐까? 세상은 이중슬릿이다. 동시에 있고, 없고, 좋고, 나쁘고, 나와 같고 다르다. 그 복잡함을 끌어안는 것. 그것이 고통을 넘어서는 첫걸음이다.
데이비드 봄은 이를 예리하게 꿰뚫었다. 그는 사물을 뚝뚝 잘라내고 이름 붙이는 우리의 습관, 바로 그 안에 인종주의와 민족주의, 나아가 전체주의의 씨앗이 숨어 있다고 보았다. "이건 나다, 저건 너다" 하고 칼로 자르듯 세계를 분리하는 사고가 혐오와 배제를 낳는다는 것이다. 정체성의 이름으로 타인을 고정시키는 행위—그게 바로 폭력의 시작이다.
양자역학은 이 고정의 욕망을 흔든다. 존재는 더 이상 단단한 벽돌이 아니라, 물결이고 흔들림이다. 입자가 있으면서도 없고, 내가 나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고정된 실체는 없다. 자아도 파동이고, 타자도 확률이다. 선과 악, 나와 너, 중심과 주변—모두 경계 없는 스펙트럼으로 펼쳐진다. 그 순간, 우리는 '같음'이 아니라 '다름'의 춤을 출 수 있게 된다.
이런 사고는 정치와 사회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게 한다. 더 이상 국민과 비국민, 우리와 적이라는 이분법은 작동하지 않는다. 차이를 고정하는 대신, 관계의 흐름을 읽게 된다. 사회란 콘크리트 구조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고 뒤섞이는 파동장이다. 말하자면 민주주의란, 고정된 규칙이 아니라 살아 있는 중첩 상태인 셈이다. 불안정하지만, 그 안에 무한한 가능성이 깃들어 있다. 봄은 이를 '암묵적 질서'라 불렀다. 드러난 것 뒤에 숨어 있는 흐름의 질서. 그것을 볼 수 있어야 진짜 앎이 시작된다.
소승불교의 아비달마는 일종의 고대 불교판 분자생물학이었다. 지수화풍이라는 네 가지 물질적 요소에다 모양, 냄새, 맛, 촉감 같은 속성까지 더해, 인간의 몸과 세계를 구성하는 가장 기초적인 단위들을 분석했다. 분해하고 또 분해하며, 세상의 모든 현상이 어떤 물질적 조합으로 이루어졌는지를 밝히려 한 것이다. 지금으로 치면 원자, 분자, 뉴런, 호르몬 따위를 다루는 세밀한 해부도면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너무 쪼개다 보니, 이론은 점점 산으로 간다. 설명은 정교해지는데, 삶의 통찰은 멀어진다. 결국 '마음'이 실종된 셈이다. 대승불교는 이런 아비달마를 향해 직격탄을 날린다. "너무 복잡하고, 너무 번잡하다. 핵심을 놓쳤다!" 세친은 이 비판을 수용하면서도, 그 방대한 이론을 하나로 정리해 『아비달마구사론』이라는 경전으로 묶는다. 요약이 아니라, 소승의 분석적 사유와 대승의 공 사상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자처한 것이다.
이 작업은 종교적 신앙심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존재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 그것이 조합되는 방식, 감각과 인식의 상호작용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이건 오늘날의 과학적 방법론과 닮아 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실험기구 대신 사유를 쓰고, 통계 대신 마음의 흐름을 추적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오감과 오온, 색수상행식이 그들의 실험 장비였다.
하지만 이 분석은 결국 '공'이라는 전혀 다른 문턱 앞에서 멈추게 된다. 아무리 쪼개고 쪼개도, 그 안에는 독립된 실체가 없다. 모든 것은 관계 속에 놓여 있다. 그러니 분석만으로는 삶을 이해할 수 없다. 관계의 그물망을 보지 못하면, 분해는 공허한 장난이 되고 만다. 이 지점에서 과학은 철학이 되고, 철학은 다시 종교와 만난다. 그 만남의 현장이 바로 아비달마이고, 구사론이며, 지금의 양자역학이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양자역학은 실험실 안에서 수식을 다루는 과학이지만, 그 파장은 인식의 지평 전체를 흔든다. 입자의 움직임을 다루는 게 아니라, 존재란 무엇인지, '나'란 누구인지, 세계는 어떻게 엮여 있는지를 묻는다. 이건 물리학자의 메모장이 아니라 철학자의 노트에 더 가깝다.
양자역학은 우리에게 다시 묻는다. 자아는 고정된 실체인가? 세계는 딱딱하게 분리된 대상들의 집합인가? 아니다. 그 모든 것은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입자가 있는 것도, 나라는 주체가 있는 것도, 모두 '관찰'이라는 사건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이 말은 곧, 고통도 실체가 아니며, 집착도 환상이라는 뜻이다. 누군가 나를 미워할 때, 그 감정은 나의 본질이 아니라 그 순간의 상호작용일 뿐이다. 마치 전자가 관측되지 않으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듯이.
그래서 양자역학은 실체에 대한 맹신을 걷어내고, 관계의 무한한 가능성을 제시한다. 자아도, 타자도, 선도, 악도 고정할 수 없다. 고정하려는 순간, 분열과 혐오가 자라난다. 하지만 흐름으로 이해하면, 나와 너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고, 연대와 공감이 스며든다. 우리는 더 이상 '정답'을 찾지 않는다. 그 대신 다양한 가능성 속에서 살아 있는 질문을 품는다.
고전 물리학이 우리에게 세계의 구조를 알려주었다면, 양자역학은 그 구조가 유동적이고 생생한 관계망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건 과학이 철학과 시로 진화하는 순간이다. 물질을 연구하다가 결국 마음과 만난 것이다. 양자역학이 열어준 문은 단지 실험실이 아니라, 세계를 보는 눈, 나를 대하는 태도, 타자를 품는 감각까지 통째로 바꾸는 거대한 지각 변동이다.
실체는 없다, 관계만 있다
달라이 라마가 외워야 했다는 "구사론(俱舍論)". 이름만 들어도 머리카락이 한 움큼 빠지는 기분이다. 단지 수행서가 아니라, 우주론, 입자론, 물리학, 해부학, 윤리학, 심리학까지, 이 모든 학문이 합체된 '범우주 백과사전'이다. 이쯤 되면 법복 입은 과학자라고 불러야 할 판이다.
그런데 그걸 왜 외우느냐고? 암기력 자랑이 아니다. 수행자에게 이론은 박제된 지식이 아니라, 살아 있는 지도다. 지도도 종이 위에서만 보면 그냥 그림이다. 길 위에서 걸으며, 때로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서야 비로소 방향이 생긴다. 그러니 외운다는 건 걷는 것이다.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입으로, 숨으로.
무예를 익힐 때도 그렇다. 팔만 흔들면 소용없다. 기운과 시선, 호흡과 중심이 하나로 통할 때 비로소 기술이 된다. 구사론을 외우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는 텍스트를 읊는 것이 아니라, 우주를 안으로 들이는 일이다. 스승의 목소리와 함께, 우주의 질서가 호흡으로 들어오고, 내장의 리듬이 법의 맥박을 따라간다. 한마디로, 구사론은 '몸으로 하는 철학'이다. 경전도 결국은 살아야 말이 된다.
구사론을 보면 아주 기상천외한 표현이 나온다. 금진(토끼 터럭 끝의 미세먼지)은 원자의 2400분의 1. 이름부터 귀엽지 않은가? 그런데 그 실체를 파고들기 시작하면, 머릿속에 번개가 친다. 도대체 금진 원자가 뭔가? 방사능을 내뿜는 당근이라도 되나 싶지만,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금진 원자란, 실재하는 입자가 아니라, 사유의 허들이다. 상상의 지도를 펼칠 때 등장하는 초정밀 비유의 산물이다.
이 작은 단위는 수미산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우주의 질서를 설명하는 하나의 장치다. 수미산은 불교 우주론의 센터, 빅뱅 이전의 진중앙이다. 그 주위를 감싸고 있는 대륙과 바다, 인간계와 천계의 구조를 논하면서, 그 물질을 구성하는 입자의 크기까지 계산해 넣는다. 과학자가 현미경을 들이대기 전에, 이미 구사론의 저자들은 마음이라는 망원경으로 우주를 들여다봤다.
양자역학 이전의 우주론이라, 지금 기준으로 보면 비과학적이라고 치부될 수 있다. 하지만 이게 바로 핵심이다. 과학이 아닌 상상과 직관의 논리. 진공 속 입자를 수식 없이 직감하고, 수치 대신 상징으로 우주를 그려낸 정신의 스케치북이다. 지금 우리가 보는 건 '퇴색된 이론'이 아니라, 사유의 전성기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끝까지 따라가 보려는 그 집요함, 바로 그것이 구사론이다. 그러니 금진 원자는 귀엽기만 한 게 아니다. 우주의 구성 원리를 설명하는 불교식 힉스 입자, 상상의 극한 실험이다.
핵심은 여기다. 부파불교, 테라바다 불교의 골수를 찔러보려면 두 텍스트가 반드시 필요하다. 바로 세친보살과 구사론. 이 둘은 교재가 아니라, 당대 불교가 벌인 우주적 사유의 ‘토탈 패키지’다. 이걸 통과하지 않고서는 그들의 사유 방식, 그러니까 세계를 보는 눈, 마음을 해체하는 기술, 존재를 해부하는 칼끝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꾸 오해한다. 불교는 심리학 아니냐고. 조용히 앉아서 마음 다스리고, 화내지 말고, 욕심 부리지 말고. 일종의 '불교식 자존감 회복 프로그램' 정도로 생각한다. 명상 앱과 심리상담의 중간쯤 어디. 하지만 이건 불교의 뒷모습만 본 셈이다. 마음을 다스린다는 건, 감정 하나 눌러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그건 마치 새우젓 한 스푼으로 태평양을 맛보겠다는 것과 같다. 혹은 찻잔 속 폭풍을 우주의 기상이변으로 오해하는 격이다.
불교의 사유는 훨씬 더 대담하고, 훨씬 더 정교하다.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먼저 '마음'이라는 존재부터 해체해본다. 감정의 생성 조건을 따지고, 그 뒤에 깔린 인식의 흐름을 추적하고, 그 인식이 의존하고 있는 물질적 조건까지 파고든다. 말하자면 '마음에 대한 총체적 해부학'. 세친보살은 그래서 분류의 신이다. 눈 깜빡임 하나도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감정 하나, 지각 하나도 항목으로 등록된다. 구사론은 바로 이 정신을 교과서로 만든 것이다. 그러니 '마음 좀 다스려보자'고 이 책을 펼쳤다가, 원자의 결합 구조와 우주의 층위를 외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불교는 철저하게 통합적이다. 따로따로 찢어놓고 따지는 걸 참지 못한다. 심리, 생리, 물리—이 셋은 불교 안에서 삼위일체다. 마음을 파고들다 보면 어느새 오장육부의 리듬을 만나고, 그 리듬을 따라가다 보면 다시 이 세상의 기온과 중력, 별자리와 부딪히게 된다. 마치 하품 하나가 날씨와 연결된 것처럼.
현대 과학은 다르게 행동한다. 자, 심리는 심리학에 맡기고, 생리는 생리학, 물리는 물리학. 각각 자기 방에서 독립적으로 분석하고 측정하고 계산한다. 그렇게 해서 나온 건? 끝없는 전문화. 그런데 그렇게 나눠놓고 나니까 정작 삶 전체는 보이지 않는다. 마음은 실험실에서 나오지 않고, 몸은 기계처럼 다뤄지고, 우주는 먼 곳의 배경으로 밀려난다.
불교는 거기서 딱 돌아선다. 열반에 이르려면, 감정 조절이 아니라 우주 전체를 가로질러야 한다. 한 사람의 괴로움은 그 사람 안에만 있지 않다. 이불 속에 누운 밤의 걱정도, 결국은 뉴스 속 전쟁과 기후 위기, 먹은 음식과 숨 쉬는 공기와 연결돼 있다. 외부 세계와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속에서 괴로움은 자란다. 그러니 마음의 해방이란, 그저 명상 몇 번으로 될 일이 아니다. 몸과 마음, 바깥과 안, 물질과 정신의 끈을 하나하나 정성껏 풀어야 한다. 분리를 거부하는 이 불교의 기개, 이건 철학이 아니라 실천의 선언이다.
1998년,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안톤 자일링어. 이름부터 낯설다. 검색을 해도 대문짝만한 인터뷰 하나 나오지 않는다. 물리학계의 히든카드, 혹은 철학적 낙하산. 이분이 물리학과 인식론을 비교했다. 그러니까 물리학이 무엇을 보느냐보다, 어떻게 보느냐를 따졌다는 거다. 세상에, 이런 게 과학자라니! 측정 이전에 관찰자가 있고, 관찰 이전에 개념이 있다는 말은, 사실 철학자들이 술 마시며 하던 소리 아닌가? 그런데 자일링어는 이걸 실험 장비 앞에서 주장했다.
그가 내린 결론이 기가 막히다. 불교와 양자역학, 둘 다 실체를 거부한다는 데서 만난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 따위는 없다"고 선언한다. 그러니까 사물은 보기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고, 관계 속에서만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반야심경이 따로 없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광자 단위에서 벌어지는 상황이다.
과학이라고 해서 오직 증거와 수치의 세계라고 생각했다면, 자일링어는 단박에 그것을 뒤집는다. 그의 물리학은 물질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질문이다. 과학이라기보다는 철학, 아니 어쩌면 선(禪)에 가깝다. 실체를 부정하는 순간, 우주는 하나의 무대로 변한다. 배우는 고정된 대본이 아니라, 관객의 시선에 따라 연기를 바꾸는 즉흥 연극의 주인공이 된다. 이 얼마나 불교적인가. 실험실에서 공(空)을 실험하는 자일링어, 그 자체로 한 편의 선문답이다.
닐스 보어도 그렇다. 양자역학의 아버지이건만, 대중의 기억에서는 늘 아인슈타인 뒤에 숨어 있다. 아인슈타인은 과학계의 록스타였다. 헤어스타일도 그렇고, 명언 제조기로서의 능력도 그렇다. 히틀러만큼 유명했다니, 그 유명세가 어느 정도였을지 상상이 갈 것이다. 반면 닐스 보어는 조용한 덴마크 출신의 사색가. 이력서에 ‘물리학자’ 외에는 쓸 말이 별로 없었던 남자다.
하지만 바로 그 사람이 만든 원자모형—전자가 원자핵 주위를 도는 태양계 모형—은 지금도 교과서의 중심을 차지한다. 물론 과학적으로는 단순화된 상징이다. 실제 원자의 내부는 그렇게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보어는 단호했다. "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건 환상이고, 환상을 통해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 실제가 아닌 모형으로 이해하는 것이 오히려 진리에 가깝다는 주장. 이 얼마나 불교적인가? 붓다가 설한 비유경처럼, 상징은 진실의 가장 정교한 옷이다. 전자 하나도 그냥은 설명이 안 되는 거다. 시와 은유가 필요하다. 원자 안에서도 진리는 직선이 아니라 곡선으로 흐른다.
아인슈타인은 끝내 양자역학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왜냐? 우주는 질서 정연하고, 신은 논리적인 존재여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 유명한 말,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선언은 철학자 못지않은 그의 존재론적 고집을 보여준다. 확률? 불확정성? 그런 건 신의 품격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주는 체스판이어야 하지, 뽑기 기계여선 안 된다는 논리다.
반면 닐스 보어는 달랐다. 그는 신이 주사위 놀이를 한다면, 그 주사위가 던져지는 방식에 주목해야 한다고 봤다. 그리고 바로 그 틈에서 새로운 물리학의 세계가 열린다고 믿었다. 두 사람의 논쟁은 과학이라는 이름의 검도 시합. 도장에서 둘이 주거니 받거니 휘두른 칼끝이, 바로 확률과 실체, 원자와 우주의 개념을 송두리째 바꾸었다.
흥미로운 건 이 둘이 나치 정권의 핍박을 피해, 미국의 같은 대학—프린스턴—에 피신했다는 사실이다. 그야말로 역사상 가장 밀도 높은 '이웃사촌'. 위층엔 보어, 아래층엔 아인슈타인. 복도에서 마주치면 인사 대신 방정식을 주고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보어는 히틀러에 대한 분노보다는, 아인슈타인을 어떻게 철학적으로 설득할 수 있을지에 몰두했다. 이게 진짜 집요한 사랑이자, 고도의 지적 애정이다. 두 사람의 대화는 과학사를 넘어서 철학사의 살아 있는 전설로 남았다. 마치 불교에서 반야와 유식이 끝없이 논쟁하는 것처럼, 그들의 사유도 끝없이 진화했다.
그리고 상대성 이론. 지난주에 배운 것처럼, 빛의 속도는 어떤 경우에도 변하지 않는다. 즉, 우주의 속도 제한은 30만 km/s,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이런 정의감이 물리 법칙에 깃들어 있다는 것, 뭔가 불교스럽지 않은가? 모든 운동 상태에 있는 관찰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법칙, 이건 마치 법구경의 구절처럼 단단하다. 길이는 줄고 시간은 느려진다. 이게 바로 특수상대성이론. 말하자면, 움직임이 많을수록 너그러워진다. 길이도 줄어들고, 시간도 늘어나고. 흡사 수행자의 자비심처럼.
그리고 그 유명한 E=mc². 달라이 라마는 이 방정식을 가리켜 자신이 아는 유일한 과학 공식이라고 말했다. 어쩐지 인간적이지 않은가? 맨해튼 프로젝트의 그림자를 드리운 공식이지만, 달라이 라마의 입에서 나올 때는 도전적이고도 사색적인 사고 실험의 은유처럼 들린다. 그건 물리 공식이 아니라, 에너지와 질량이 하나라는 선언이다. 존재와 힘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가르침. 유식학의 알라야식과도 겹쳐진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쌍둥이 패러독스다. 한 명은 지구에 남고, 한 명은 우주여행을 다녀온다. 돌아오니 지구에 남은 쌍둥이는 주름이 자글자글. 그런데 우주 다녀온 동생은 여전히 탱탱하다. 무슨 고가 화장품이라도 발랐나 싶지만, 아니다. 이것이 바로 시간 지연의 효과다. 달라이 라마가 이 이야기를 듣고는 말한다. '우리도 명상 중에 이와 같은 일들을 경험합니다.' 과학은 방정식으로 증명하고, 불교는 수행으로 체험한다.
그러니 이건 과학자들만 아는 이야기가 아니다. 어릴 적 무릉도원을 다녀온 조상들의 기억에도 있고, 템플스테이에서 느긋하게 앉아 있던 우리의 엉덩이 속에도 있다. 앉았더니 몇 분 같았는데 나와 보니 두 시간이 지나 있었다. 이것이 바로 불교식 상대성 이론이다.
불교에도 있다. 무착보살이 도솔천에 갔다 온 이야기. 이건 판타지가 아니다. 유식불교의 서막을 알리는 장대한 SF적 전환이다. 무착이 차 한잔 마시고 돌아왔더니, 지상에서는 무려 50년이 흘러 있었다. 그야말로 '시간 여행' 아닌가. 하지만 무착보살은 기함하지 않았다. 대신 도솔천에서 미륵보살의 가르침을 받아왔다. 가르침을 외우는 데 걸린 시간, 찻잔 하나 식을 만큼. 이 경전을 바탕으로 유식학파가 세상에 등장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스토리, 어디서 많이 들어봤지? 맞다. 신선 이야기다. 무릉도원에서 바둑 한 판 두고 나왔더니, 마을엔 증손자가 살고 있더라. 산속에서 물고기 구워 먹다 보니, 나라가 망해 있었다. 이런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시간의 비선형성, 즉 상대성 이론의 정수를 이미 직관적으로 알고 있었던 셈이다. 시간은 절대적인 게 아니다. 공간도 마찬가지다. 모두 관계적이며 상대적이다. 그래서 탄생한 개념이 바로 시공간—스페이스 타임이다.
불교는 이걸 이미 알고 있었다. 물리 법칙으로가 아니라, 마음의 사유로. 숫자나 그래프 대신 명상과 직관, 수행과 통찰로. 스티븐 호킹이 블랙홀을 들여다볼 때, 무착보살은 도솔천을 다녀왔다. 누구는 망원경으로 우주를 보고, 누구는 눈을 감아 우주를 느꼈다. 방식은 달라도, 도달한 경지는 크게 다르지 않다. 아니, 어쩌면 무착보살 쪽이 한 수 위일지도 모른다. 그는 돌아와서 그걸 시로, 경전으로, 수행으로 풀어냈으니까.
이제 질문이 하나 생긴다. 과학과 철학, 윤리와 물리, 심리와 우주—이렇게 줄을 쫙 그어 서로 등을 돌리게 만든 게 과연 잘한 일일까? 각각이 자기 방에서 문 걸어잠그고 자기 말만 한다면, 그 방은 곧 감옥이 된다. 그럼 해방은 어디서 오나? 벽을 허무는 데서 온다.
달라이 라마가 구사론을 외운다는 건 기억 놀이가 아니다. 그건 실로 기가 막힌 ‘사유의 무예’다. 원자와 우주, 감정과 중력, 도솔천과 미립자 사이를 오가며 춤을 추는 수행이다. 칼날 같은 집중력으로 우주의 숨결을 따라가는 것이다. 도대체 어떤 수행이 원자의 결집력과 수미산의 위치를 함께 암송하게 만들겠는가? 물리학자는 원자를 쪼개지만, 달라이 라마는 그것들을 엮는다. 양자역학과 윤회, 상대성 이론과 열반, 모두 하나의 흐름에서 출렁인다.
다시 말해, 나눌 필요가 없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미 나눌 수 없는 것을 억지로 잘라놓은 셈이다. 그러니 구사론을 외운다는 것은 단지 인도 승려의 고된 수행이 아니라, 이 시대에 가장 혁신적인 ‘통합 사고’의 표본이다. 그러니 감동받지 않을 수 없다. 우주의 구조와 마음의 작동을 하나의 문장으로 엮어내는 그 수행의 길이, 지금 우리가 잃어버린 통찰의 회복이기 때문이다.